재현 윤리
예술의 기본 목적은 인물 또는 사물의 재현이라고 합니다. 현대 예술 철학자인 단토는 대상이 예술 작품이 되기 위해 무엇에 관함과 구현이라는 두 가지 필수 요소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무엇을 담아낼지’와 ‘어떻게 담아낼지’인데요. 재현의 윤리가 중요한 이유는 바로 여기 있습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고통을 재현할 때 늘 난관에 부딪힙니다. 현실을 담아도 어떻게 담아내는지에 따라 작품은 완전히 다르게 읽힙니다. 예술작품 속 재현의 윤리. 지역 여성 예술인들이 말하는 재현의 윤리는 어떤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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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작품을 창작하거나 향유하면서 재현 윤리에 대해 고민해 본 적이 있나요?
- 페콤 : 고전 작품들에는 소위 ‘빻은’ 작품들 많아요. 공연하는 사람에게는 셰익스피어 작품을 빼놓을 수가 없는데 대부분의 작품에 추행을 하거나 폭력을 가하는 등 트리거(Trigger)를 유발할 수 있는 요소들이 있죠. 그런데 그런 작품들이 지역에서 계속 그대로 재현되고 있어서 굉장히 불편해요. 나라면 이 작품을 공연으로 올릴 때 어떻게 해석하고 표현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본 게 고민의 시작이에요. 무엇을 어떻게 바라보고 표현할지에 대한 창작자의 고민과 성찰이 필요한 시기이죠.
- 보듬 : 얼마 전 창극 ‘심청’을 보면서 더 이상 아버지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딸이 숭고하게 그려지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고 느꼈어요. 그런데 단순히 ‘싫다’가 아닌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라는 물음표가 뒤따른 거죠.
- 종구 : 공연을 볼 때 캐릭터에 감정이입을 해서 보는 편인데요, 피해자나 가해자 어느 쪽에게도 이입하고 싶지 않을 때 어떻게 공연을 봐야 할지 힘들더라고요. 만약 유아, 청소년 관객들이 저처럼 캐릭터에 감정이입을 한다면 성폭력과 같은 장면이 아무런 고민 없이 재현되는 것이 맞나 생각이 들었어요.
- 이방인 : 어린 시절, 지킬앤하이드 작품을 봤을 땐 마냥 좋고 재밌었어요. 후에 성인지 감수성과 페미니즘을 배우고 올해 그 작품을 다시 보니까 정말 잘못됐고 실패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중요한 건 재현 윤리를 인지를 하는가, 못하는가의 문제인 것 같아요. 어릴 때의 지킬앤하이드를 보고 웃고 떠들던 과거가 창피하네요.
- 파이 : ‘섹스’를 주제로 전시한 적이 있어요. 섹스가 무겁거나 무조건 숨겨야 하는 게 아니라는 걸 말하고 싶었는데, 당시엔 성매매 여성들에게는 전시가 어떻게 다가갈지 전혀 생각을 못 했어요. 보기 싫은 사람들은 안 보면 되지 생각했어요. 제가 전하고 싶은 이야기만 전한 거죠. 그런데 웃긴 건 전시를 하면서도 저도 불편했어요. 왜 불편한지는 몰랐어요. 그때 재현의 윤리를 알았다면 그렇게 안 했을 것 같아요.
- 오리온 : 예술가로 길러지며 중요한 덕목으로 가르치는 게 좋은 예술을 칭송하고 찬양하게 하는 것이에요. 셰익스피어 작품이 얼마나 대단한 바이블인지, 위대한 작품에 계속 왕관을 씌워주고 예술가에게 주입을 하죠. 그렇게 길러진 예술가들은 비판적 시선을 가지는 게 쉽지 않아요. 비판하는 순간 자격을 운운하며 본인의 능력을 평가해버리니까요. 그게 예술교육의 현시점이에요. 그래서 오리온님에게 창피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고 싶어요. 저는 젠더 프리 캐스팅이나 무대에서 폭력 재현에 고민한 적은 있지만 깊은 수준은 아니어서 다른 페미니스트 동료들에게 작품을 당당히 보여줄 수 없다는 생각이 재현 윤리를 고민한 시작이었던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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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현 윤리는 주로 성범죄, 가난, 살인, 전쟁 등의 고통스러운 현실을 담아낼 때 논의됩니다. 예술작품에서 재현 윤리는 왜 중요할까요?
- 종구 : SNS에서 여성을 강제로 끌어당기거나 하대하는 영화 장면에 대해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는 천박한 댓글이 달린 걸 본 적 있어요, 이런 장면들은 영화가 주고자 하는 메시지나 맥락과 동떨어져 자극적이고 화제를 불러일으키기 위해 많이 쓰이잖아요. 이처럼 사람들이 장면을 악용할 수 있기 때문에 재현 윤리는 반드시 고민되어야 해요.
- 오리온 : 일본군 ‘위안부’를 다룬 영화 ‘귀향’은 강간 사실을 적나라하게 표현하지 않아도 역사적 사실을 다 알고 있는데 카메라 앵글로 내리찍고 관망하듯 표현했죠. KT 올레TV에서 귀향을 성폭행, 성인용 영화 카테고리로 분류했어요. 감독은 ‘위안부’라는 소재를 뜻깊게 전달하고 연대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경력으로 ‘이용’한 걸로 보여요. 콘텐츠는 좋았을지 몰라도 어떻게 담아낼지에 대한 고민이 없었어요. 영화는 예술보다는 산업에 더 맞닿아 있기 때문에 재현 윤리가 더 중요한데, 크게 네 가지 관점으로 고민해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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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리온 : 예술인에게 ‘이제는 재현 윤리가 트렌드다,’, ‘재현 윤리를 공부함으로써 너의 예술세계가 더 확장될 수 있다’고 말해주고 싶어요. 사실 무엇 때문에 재현의 윤리가 중요한지는 개개인의 생각이 다를 수 있어요. 분명한 것은 더 많은 사람들이 불편함을 느끼고 목소리를 낼 때 문화가 될 거예요.
- 보듬 : 전쟁영화를 볼 때 사람이 죽는 것이 흔해서 볼 때는 별생각 없었는데요, 최근에 인터넷을 검색하다 지뢰로 발목을 잃은 사람 사진을 보았는데 너무 충격이었어요. 전쟁은 한 사람의 삶이 파괴되는 것뿐만 아니라 모든 걸 앗아가더라고요. 이게 작품의 현실의 차이인 것 같아요. 제 3자의 시선이 개입해서 무엇을 강조하고 무엇을 뺄지, 어떻게 보일 것인지가 모두 의도된 것이니까요.
- 파이 : 저는 무섭고 잔인한 장면을 못 봐요. 그런데 주위 사람들은 저를 ‘재밌는 장면을 놓친 사람’라고 생각해요. 일반 부류에서 벗어나는 이상한 애가 되는 거죠. 작품에 재현 윤리가 없다면 폭력적이고 자극적인 장면이 더 많이 생길 거고, 사람들은 그것을 당연하게 수용할 거예요. 그럼 저처럼 ‘이상한’ 사람이 더 생길 거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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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 또는 향유했던 예술작품 중, 재현 윤리 문제를 체감했던 작품을 알려주세요.
- 페콤 : 예전에 제가 맡은 역할 중 남편 때문에 열 받아서 옷을 다 벗는 캐릭터가 있었는데요. 더블 캐스팅된 배우가 해당 장면에서 옷을 다 벗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내가 더 잘해야지’라는 생각부터 했던 경험이 있어요. ‘왜 이 장면이 필요한지’에 대한 고민이 아닌, 옷을 다 벗었을 때 겨드랑이 털이 보이지 않을까 화장실로 달려가 확인부터 했었죠. 지금 돌이켜보면 그 상황을 방관해 보기만 하던 연출이 너무 폭력적이었다고 느껴져요.
- 이방인 : 대학생 때 연극과 교수님이 에쿠우스 작품의 성행위를 연기하라고 시키는 거예요. 제가 당황하자 ‘너 못해? 너 섹스하잖아. 안 해?’라고 말씀하셨어요. 배우는 시키면 무조건 다 해야 하는 거라고 줄곧 착각하고 살아왔죠. 이런 지점들을 인지할 수 있기까지 시간이 걸렸어요.
- 오리온 : 전주시립극단 작품은 재현 윤리에 대한 고민이 전혀 없어요. 맥베스, 봄날, 시집가는 날, 오셀로... 페미니즘 관점을 가진 여성 예술인뿐만이 아니라, 일반 관객들 속에서도 불편하다고 하는 의견이 하나 둘 나오고 있죠. 영화 ‘범죄도시 1’의 경우엔 윤계상 역의 장첸이 부하의 여자 친구를 강간하는 장면이 있었어요. 불필요하고 불편하다는 목소리가 들끓었어요. 시민 여론을 수렴해 ‘범죄도시 2’에는 강간 장면이 나오지 않아요. 폭력의 경우에도 폭력을 ‘제압’하는 선한 폭력이 주를 이루죠. 불편하면 ‘안 봐’가 아닌 시민들이 작품이 불편하다고 이야기를 더 많이 해야 하는 이유에요.
- 보듬 : 요즘 가장 핫한 ‘이상한 변우사 우영우’에서 박은빈 배우는 카메라가 꺼지면 우영우를 절대 따라 하지 않는다고 해요. 자폐증을 앓고 있는 사람을 희화화하지 않기 위해서요. 그런데 요즘엔 우영우를 따라 하는 유튜버까지 있고, 영화 ‘7번방의 선물’이 개봉했을 때도 사람들이 용구 역을 웃기게 따라 했죠.
- 파이 : 영화 ‘말아톤’의 조승우도 마찬가지예요. 사람들이 윤초원의 명대사들을 엄청 따라 했죠. 기자가 조승우에게 자폐아처럼 포즈를 해달라고 하자 조승우가 분노를 하며 자폐 아동에 대한 기본적인 상식도, 예의도 없는 불쾌한 요구라고 화를 냈어요. 이게 정상적이고 올바른 반응이란 걸 사람들이 인지하기 시작한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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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비난이 아닌 비판으로 더 건강한 작품을 즐기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바라는 재현 윤리의 고민이 들어있는 작품은 어떤 모습일까요?
- 보듬 : 저는 이 질문을 들으며 최근에 불편했던 창극 심청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 고민했거든요. 심청이가 성공한 사업가가 돼서 자신의 능력으로 공양미 삼백 석을 구한다든지, 지금까지 심학규의 꿈이었다든지 하는 식으로 상상해 봤어요. 충분히 다른 방향이 있지 않을까요?
- 종구 : 드라마 우영우에서 다리미 폭행 장면이 있는데, 가해자나 피해자를 직접 보여주지 않고 다리미를 확대하는 식으로 대체해요. 보통 ‘회식’하면 생각나는 메뉴는 고기이기 마련인데요, 우영우에서 변호사들의 회식에는 비빔밥이 등장했어요. 비건들에게 고기가 불편하고 폭력적일 수 있기 때문에 비빔밥으로 대체한 게 좋아 보였어요.
- 페콤 : 전북여성예술인연대에서 작년에 진행한 ‘에이 그건 예술이에요’ 역시 같은 고민에서 시작한 프로젝트에요. 남성을 위해 존재하거나, 수동적, 퇴폐적, 지나치게 미화된 여성 캐릭터를 동시대의 시선으로 재해석하죠. 권력형 성폭력의 피해자 성춘향부터 애인과 아버지를 죽이고 미쳐버린 햄릿의 오필리어, 오해와 시기로 죽음을 택한 백조의 호수 속 오데트, 변절한 남편으로 할복하는 나비부인 초초상, 작가의 시선으로 자신의 삶을 항변조차 할 수 없었던 B 사감까지. 고전이라는 미명하에 작품 속에 갇혀버린 여성 캐릭터에 새 숨을 불어넣고 다시 호명하죠.
에이 그건 예술이에요 영상 시청 ▶ https://www.youtube.com/watch?=elOD5M8HCF8
- 오리온 : 작품의 관점을 바꿔보는 일은 정말 필요한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지킬앤하이드를 루시의 관점으로 바꿔볼 수도 있겠죠. 저는 예술작품이 재현 윤리 틀 안에만 갇히는 것도 좋지 않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분명한 건, 타인의 권리를 뺏으면서까지 예술의 당위성을 가져가면 안 된다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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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적 시선이 결여된 예술을 진정한 예술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지역여성예술인들이 날카롭게 재현의 윤리를 묻습니다. 더 이상 우리는 타인의 불행과 고통을 쉽게 희화화하고 방관하고 소비하고 싶지 않습니다. 창작자들의 뼈아픈 고민과 관객들의 불편한 목소리가 필요한 때입니다.
by. 알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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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문화관광재단
2022 성평등 문화예술비평학교
'문화예술다리미' 참여자 모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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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거점형양성평등센터 × 로컬프리
× 프리데코 × 어쩌다청년 × 둥근숲
이어 말하기 : OO으로 산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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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디지털독립영화관
픽업시네마 with 송원 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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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거점형 양성평등센터
전북 여성청년 네트워크를 위한 프로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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