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밀한 자기소개 ! 부탁드립니다.

굉장히 일 중심적이고 이성적이며, 옳고 그름이 분명한 일들을 해온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굉장히 내성적이고 긴장도 많이 하는 ‘정상순’입니다.

배우, 연출가, 작가, 사회 활동가 등 다양한 삶을 살고 계세요. 상순님은 어떤 일을 할 때 가장 자유롭다고 느껴지시나요?

밭일이요. 저는 집에 온전히 혼자 있는 시간을 좋아해요. 사회성이 되게 떨어지는 사람이거든요. 실수하지 않고 긴장하지 않고 뭔가 잘해야 된다는 마음이 드니까 엄청 힘들어요. 그래서 그런지 밭일할 때, 나무 가지치기 할 때, 반려견과 산책할 때가 제일 자유로운 것 같아요.

마을 공동체 사람들과 함께 공연을 하시는데요. 비예술인들과 창작 활동을 하는 것에 어려움이 있었을 것 같아요.

처음에는 엄청 힘들었어요. 그런데 돌아보니 다 저 때문에 힘든 거였더라고요. ‘왜 연습 시간 안 지키지?’, ‘캐릭터에 대한 인물 분석도 안 된 상태에서 무대에 올라간다고 하네?’라는 생각들은 제가 배운 연극의 어떤 ‘습’ 그런 거에서 나온 거였어요. 지금 생각하면 단원들에게 정말 미안한 일이죠, 그렇게 ‘내가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구나.’라는 생각을 한 다음부터 마음이 훨씬 가벼워지고 즐거워졌어요. 지금은 단원들이 저보다 더 준비하고 걱정하며 열심히 해요.

가장 기억에 남는 공연 연습 에피소드가 있으신가요?

작년에 가사 노동을 10년 이상 한 사람들이 모여 무대에 올라간 적이 있어요. 연습을 하는데 A 배우 핸드폰이 갑자기 울리는 거예요. 예전의 저라면 연습 시간에 무슨 전화냐고 화가 났을 텐데, “받아~”그랬죠. 방과 후 끝날 시간이라 아이들이 엄마를 찾기 시작하는 시간이었거든요. 전화를 끊고 “이제 연습하자.”하는데 B 배우 핸드폰도 울리는 거예요. 역시 아이였어요. 이 전화까지 마치고 “이제 진짜 제대로 연습하자~!”라고 하는데 이번엔 우리 딸에게 전화가 오더라고요. 결국 다 같이 웃으면서 “우리가 공연 한번 해보겠다는데 계속 전화 오는 이 상황이 가사노동 분투사지! 뭐가 더 있겠어!”라고 했던 경험이 있네요.

매달 한편의 공연 및 연극 워크숍을 진행하는 ‘월간 정상순’을 운영하고 계세요. 만들게 된 계기가 있으세요?

작년 변희수 하사가 돌아가셨을 때 그리고 가수 설리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때, N번방 사건이 수면 위로 떠올랐을 때 등. 이 모든 일이 저에게는 ‘세월호’만큼 크게 다가왔던 것 같아요. ‘언제까지 이런 일이 발생한 다음 뒤통수 맞은 상태로 살아야 할까?’라는 어떤 위기감이었어요. 뒤통수 맞지 말고 매달 얘기를 계속하고 있어야겠다. 우리 마을에 그러한 플랫폼 역할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마을 사람들과 함께 만들게 되었어요.

‘월간 정상순’을 보면 직관적인 제목 만들기의 달인이신 것 같아요. (‘나의 깊고 아픈 밤_서로를 돌보는 우리’, ‘가사 노동 분투사’. ‘나는 동물이다_당신도 그러하다’, ‘쉿! 다른 이야기를 해 봐’, ‘부르카 ,오!부르카’. ‘불복종’ 등) 어쩜 이렇게 제목을 멋지게 만드시나요? 작품을 정하는 기준이 있을까요?

작사, 작곡. 배우, 연출 등 무턱대고 제가 다 해요. 석양 보다가, 걷다가, 언제든 떠오르는 멜로디가 있으면 핸드폰에 저장해놓고 건반 쳐서 노래로 만들고 단원들에게 불러보자고 해요. 제 노래는 아주 단순해서 어려울 수가 없어요. 그래서 ‘공연이 잘 됐을까? 안 됐을까?’의 기준은 다 끝난 다음 사람들이 제 노래를 ‘계속 따라 부르나’, ‘안 따라 부르나’로 판명 나요. 그런데 사실 안 따라 부를 수가 없어요. 너무 쉽거든요. 그리고 저는 브레히트 연출법을 좋아해서 노래와 춤이 꼭 들어가요. 무거운 작품일수록 이완시키는 장치들이 필요하거든요.

'매월 OO만 원이면 예술만을 전업으로 지속할 수 있다.' 상순님만의 OO은 얼마인가요?

도시와 지역의 개념이 다를 수 있겠지만 전 100만 원이면 될 것 같아요, 저희는 대관비 없이 동네 마을회관이나 집 마당에서 공연 연습을 하니까요. 전업이라 하면 예술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느냐 문제일 텐데, 지역에서의 삶은 그렇게 환원되지 않는 게 많아요. 단편적인 예로 사람들이 ‘월간 정상순’ 구독료를 자신들이 재배한 복숭아나 포도로 갖고 오기도 해요. 노동의 대가로 쌀을 받은 적도 있고요, 이렇게 화폐 단위로 뭔가를 생각한다는 게 저한테 되게 어려운 일이에요. 만약 화폐가 오고 간다 그러면, 주로 작업하는 친구들이 저를 포함해 5명 정도 되는데, 지금 금액의 약 4배 정도인 20만 원을 나눌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아요. 딱 100만 원이면 될 것 같네요. (웃음)

상순님은 딸들에게 어떤 사람이고 싶으신가요?

영화 ‘리틀 포레스트’ 보셨나요? 배우 김태리가 고향 집에 도착해 먹거리를 찾잖아요. 추운 겨울, 눈밭의 얼음을 털면 파와 배추가 있다는 걸 알고 있는 사람의 삶은 정말 소중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불을 지필 줄 알고, 스스로를 따뜻하게 하기 위해 집안의 온기를 채우는 사람. 우리 아이들이 그런 사람이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저한테 n번방 사건은 양육자로서 어떤 트리거 같은 거였거든요. “내가 시키는 대로 안 하면 너희 부모에게 말할 거야.” 피해자들은 그 말에 굴복했어요. 부모가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사람’으로 인식되는 게 아니라 부모가 이런 일을 알면 큰일 난다고 생각하는 게 너무나 충격적이었어요. 그래서 저는 애들을 서포트(Suport) 해주는 게 아니라, 애들이 도움을 청하도록 만들고 싶어요, 도움을 청할 이로 ‘엄마’를 떠올릴 수 있게 하는 사람이고 싶어요.

활동을 하며, 나를 이끌어줄 선배 예술인이 있다고 느끼시나요?

여성 선배 예술인은 없는 것 같아요. 하지만 전형적이고 통념상의 예술인이 아니라고 한다면 많은 것 같아요. 제가 40대 일 때 “너 50대 되면 더 좋다?!”라고 얘기해 주는 언니들, 그리고 제가 아플 때 따듯한 음식을 보내주는 사람들이 저에겐 모두 여성 선배들이에요. 특히 지역은 그런 경계가 없어요. 다 한 예술 하시는 분들이거든요. 밭일도 예술! 음식 맛도 예술! 공간을 가꾸는 것도 예술! 예술의 범위를 협소하게 잡으면 되게 쓸쓸한 대답을 해야 되는 거죠.

그렇다면 정상순님은 어떤 선배 예술인으로 존재하고 싶나요?

저는 송은이 씨를 정말 존경해요 자기가 센터로 나가거나 앞으로 나가지 않아도 판을 계속 만들어주는... 후배들에게 그렇게 판을 벌려주면서 나이 들면 좋을 것 같아요. 그러다가 어느새 저는 관객이 되어 앉아 있으면 좋겠어요. 아무도 안 보러 와도 내가 보러 간다, 그렇게 큰 힘이 되어주고 싶어요.

지역에서 활동하는 여성 예술인들한테 꼭 해주고 싶은 말은?

“당신이 한 선택은 다 옳다.” 문턱이 높은 것처럼 느껴지고, 조용한 건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지금 이 순간 너무 충분하고 뭘 해도 다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어요. 안 해도 괜찮고요. ‘내가 뭘 하고 있나, 내가 제대로 하고 있나.’ 이런 시험에 들지 마시고 덥석 하셨으면 좋겠어요.

앞으로 어떤 작품을 하고 싶으신가요?

작년 저희 마을에서 성 다양성 축제에 초청을 받아 공연을 했어요. ‘생태 다양성’을 주제로 공연을 했는데, 무거운 내용과 다르게 숲속에서 맨발로 흙을 밟으며 캐스터네츠를 두드리고 노래를 부르며 진행했어요. 배우들은 숲 나무 기둥에 기대어 있다가 나뭇잎 사이사이 햇살을 받으며 등장을 했고요. 저희도 함께 즐길 수 있는 공연. 그런 공연을 다시 해보고 싶어요. 또 하나는 코미디를 하고 싶어요. 페미니스트로 살아가는 저한테 제일 필요한 게 임파워링이 아니라 결국 유머감각이라는 걸 알았어요. 세상을 살아가며 어이없는 일에 대응하는 나만의 방법을 오히려 희화화해버리고 차라리 웃음이라도 찾자! 우당탕 탕탕 넘어지고 일어서는 그런 슬랩스틱 코미디가 하고 싶어요.

삶을 수행해 나아가면서 살아가고 계신다는 느낌이었어요. 진정한 돌봄의 가치도 그리고 예술인으로서 살아가는 모습들 하나하나의 삶이 귀하게 느껴지는 시간이었습니다. 멋진 여성 선배 예술인으로 존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생뚱맞지만 다음에 만날 때는 언니라고 불러도 될까요?

당연하죠! 우리 허그 해도 될까요?

부서질 듯 누군가를 안아본 게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 순간의 따듯함은 위로가 되고 좀 더 버텨볼 힘이 된다. 진정한 자유는 나 자신을 온전히 있는 그대로 바라볼 줄 아는 것. 상순님을 보며 다시금 깨닫게 된다.

by. 반짝

전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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