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밀하고 사적인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MBTI 검사를 해보니까 ‘I’가 나오더라고요. 네. 상당히 내향적인 사람이에요. 부끄러움도 많고, 소심하기도 하고, 걱정도 많고... 그렇게 미술을 사랑하는, 무대미술가 김지애 입니다.

언제부터 예술을 하셨나요?

저희 엄마가 작은 화랑을 운영하며, 창작 활동을 하셨어요. 그래서 아주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다양한 미술을 접하게 됐고요. 친구들이랑 뛰어놀기보다 혼자 꼼지락꼼지락 그림 그리고 엉뚱한 상상하는 걸 좋아했어요. 예술의 화려함보다는 소담한 환경에서 자랐는데, 아무래도 엄마의 영향이 컸던 것 같아요. 저에겐 예술이 운명이었던 거죠.

무대 디자이너를 꿈꾸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조금 웃긴데요. 초등학교 5학년 때, TV를 보다가 R&B에 빠졌어요. 정확히는 1990년 혜성처럼 등장한 그룹 ‘솔리드’에게 빠진 거죠. 보자마자 열혈 팬이 됐어요. 솔리드의 공연을 녹화까지 해가며 챙기다 보니 어느 순간 무대들이 눈에 띄더라고요. 오빠들의 팬으로서(웃음) 무대가 좀 유치하다고 느껴졌어요. ‘내가 하면 더 재밌게! 멋지게 꾸며줄 수 있을 텐데’라는 마음도 들었고요. 그래서 그때부터 무대에 대한 흥미를 갖게 된 것 같아요.

서양화를 시작으로 무대미술을 전공하고 무대 디자인을 하게 되셨는데, 무대 미술의 가장 큰 매력이 무엇인가요?

서양화는 대체적으로 평면 작업을 해요. 그런데 무대라는 공간으로 들어가니 모든 게 다 입체적인 거예요. 입체적 아이디어 작업 뿐만 아니라 평면으로 작업한 아이디어 또한 무대에 올리는 순간, 음향과 조명이 입혀지고, 배우들의 움직임이 생기면 금세 역동적인 공간이 완성돼요. 그 모습을 보면 가슴이 벅차오르죠. 무대 미술을 경험해 본 분들이라면 다 아실 거예요. 정말 매력 있어요.

망관부 8월호 주제는 ‘사랑’인데요~ 사랑이 참 쉬운 것 같으면서도 어려워요. 디자이너님의 가장 뜨거웠던 사랑은 무엇인가요?

저의 현재 뜨거운 사랑은 제 짝꿍이고요^^ 과거의 뜨거웠던 사랑은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이에요. 부모님이 예고 입학 선물로 열흘 동안 유럽 배낭여행 기회를 주셨어요. 여행 중 이탈리아 밀라노를 잠시 들렸다가 ‘라 스칼라 극장’ 백스테이지를 살짝 엿 볼 수 있었는데, 그때 그 순간은 평생 잊을 수 없을 거예요. 너무 좋아서 심장이 터질 것만 같고, 어떻게 할 줄을 몰라 타버릴 것 같은 감정을 느꼈어요. 여행에서 돌아와 어떻게 하면 다시 그곳을 갈 수 있을까 고민을 했어요. 그리고 이탈리아로 유학을 가서 라 스칼라 극장에서 일하겠다는 다짐을 했죠. 그 의지 하나만으로 죽기 살기로 매달려 부모님을 설득하고, 고등학교 2학년 2학기가 시작하는 날, 자퇴 후 유학을 떠났어요. 그때가 제 인생에서 가장 뜨거웠던 순간이자 꿈에 대한 사랑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 당시 유학 생활이 너무 힘들었을 것 같아요. 미성년자였으니까요.

너무 용감했나 봐요. 부모님이 밀라노까지 저를 데려다주셨는데, 함께하는 3박 4일이 지나고 나니 “큰일 났네. 너무 다른 세상이야. 나 이제 정말 혼자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당시 하숙집 앞에 공원이 있었는데, 분수대 앞에서 몇 시간씩 울다 들어갔던 것 같아요. 할 줄 아는 말이라고는 ‘안녕하세요. 죄송합니다. 감사합니다.’ 이 세 단어뿐이었으니까요. 그렇게 6개월 동안 어학연수를 밟고, 저를 받아줄 학교를 찾아 면접 심사를 보고 밀라노 예술고등학교에 편입학을 했어요.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정말 무모했네요.

부모님의 사랑이 정말 대단하세요. 미성년자인 딸을 타국에 홀로 보낸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 같은데…

맞아요! 정말 대단하세요. 제가 아직 아이는 없지만 상상을 해본다면, 전 힘들 것 같아요. 경제적 상황도 안 되고(웃음) 상황이 된다고 해도 딸을 혼자 보낼 수 있을까… 자신 없네요. 저희 부모님도 어떻게 보면 배팅을 하신 것 같아요. 제가 너무 가고 싶다고 매일 울부짖었으니까. 걱정이 앞서도 내 딸의 포부와 꿈을 전폭적으로 믿고 지지해 줘야겠다는 생각이셨대요. 사실 이 말은 지금까지도 감동의 물결이에요. 여전히 아이처럼 부모님과 투덕거리지만 저를 믿어주신 마음이 신기하고 감사하고 그래요.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은 죽기 전에 가봐야 할 세계 3대 극장이라고 불립니다. 유서 깊은 극장이잖아요. 실제로 무대미술팀에서 근무하셨는데 오래된 극장에서만 느낄 수 있는 고유성이 있을까요?

맞아요. 1778년도에 세워진 유서 깊은 극장이에요. 오랜 극장이나 보니 업무적으로도 분업이 잘 되어 있는 게 장점이에요. 아주 오랜 세월을 거쳐 지금의 시스템이 생긴 거죠. 무대미술팀 제작소는 밀라노 시내 중심에 있어요. 2만 평 정도 공간 안에서 무대팀, 소품팀, 조각팀, 철강 구조팀, 의상팀, 의상 보관팀, 세탁팀 등이 각자 맡은 일을 하고요. 이렇게 분야별 전문팀이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충분한 시간을 들여 최대 1년이 넘게 함께하다 보니 작품 퀄리티가 높을 수밖에 없어요. 그리고 국가적으로도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의 정신으로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장인들의 고유함을 인정하고 지원해 줘요. 만약 한국이 이러한 극장 시스템을 갖춘다면 어마어마할 거예요. 전 세계를 다 뒤집을 수 있을 텐데...

오랜 시간을 타국 그리고 수도권에서 활동을 하셨는데, 지역으로 오신 계기가 있나요?

저는 지역에 와서 여유를 찾았어요. 일을 하다가 문득 너무 바쁘게 컴퓨터 앞에서 디자인 작업을 하는 제 자신을 보게 됐어요. ‘나는 이렇게 일만 하다가 할머니가 되겠구나! 싶더라고요. 그렇게 ’정신없고 반복되는 삶을 벗어나 덜 치열하게 살 수는 없을까? ‘라는 생각을 하던 찰나에 지역으로 온 거예요. 신혼 생활을 즐기고, 공연을 맞이할 수 있는 지금이 저에겐 너무 소중해요. 일과 삶 모두 가늘고 길게 가고 싶어요.

무대 디자이너이자 감독이신데. 감독의 영역은 아직 여성의 비율이 낮은 것 같아요.

맞아요. 여성 무대 디자이너는 많지만 무대감독은 적은 편이에요. 한국 극장에서 일할 때 기술팀에 여자는 저 혼자였으니까요. 무대 디자인은 3D 직업 중 하나로 예술과 막노동이 결합된 직종이에요. 무대 감독은 극장의 전반적인 모든 시스템을 파악하고 기술적인 부분을 다룰 수 있어야 하고요. 감독은 현장에서 힘을 쓰거나 거친 일을 하게 되는 편이에요. 제가 여성 감독이어서 기술적으로 또는 힘이 필요한 상황에 대한 배려를 많이 받았어요. 감사한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속상하더라고요. 여성 감독들도 똑같이 할 수 있거든요. 앞으로는 업무가 세분화 돼 여성 무대감독의 영역이 더 많이 넓어질 거라 생각해요.

나는 월 00만 원 이면 예술만을 전업으로 살아갈 수 있다. 디자이너님의 00은 얼마인가요?

저희 팀원들과 이 주제로 이야기해본 적 있어요! 처음에는 100만 원이면 될 것 같았는데, 생각할수록 부족하더라고요. 그래서 적어도 200만 원의 수입이 있어야 예술만 온전히 집중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왔어요. 200만 원으로 그동안 저를 위해 힘써주신 부모님께 매달 용돈을 드리고 싶고 (유학까지 투자한 것에 비하면 턱없이 비참한 금액이지만) 시부모님, 제 동생들에게도 맛있는 식사 한 끼 여유롭게 살 수 있는 사람이고 싶어요. 그리고 노후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을 잠재우기 위한 저금도 해야겠네요.(웃음)

10년 뒤 디자이너님의 무대는 어떤 작품들로 이루어져 있을지 상상해 보셨나요?

10년 뒤에는 무대 미술가이자 서양화 작가이자 탄소 중립을 실천할 수 있는 작가로 활동을 하고 있었으면 좋겠어요. 이제는 규모가 크거나 작은 게 중요하지 않거든요. 성취감을 얻을 수 있는 의미 있는 작업이라면 있다면 꼭 공연, 입체화 형식이 아니어도 돼요. 정해진 규칙에서 벗어나 좀 더 자유롭게 풀어내고 싶어요. 그렇게 김지애의 예술 역사를 보여주고 싶어요,

무대라는 공간에 대한 꿈과 사랑에 빠진 강렬함이 느껴졌다.

내게도 오래되어 빛바랜 언젠가가 문득, 떠올랐다.

찾기 힘들어진 그 뜨거움이 다시 올까? 그땐 반겨줘야지..

by. 반짝